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폭격기 무적론 (문단 편집) == 각국의 상황 == [[영국]]은 이 이론에 입각하여 독일을 언제든지 칠 수 있는 위치에 대규모 폭격기 부대를 배치했고, 2차대전 중에 [[아브로 랭커스터]]를 비롯하여 성공적인 4발 중폭격기를 개발해냈다. 이 과정에서 전투기쪽이 소홀해진 문제점도 있었으나 본질적으로 적국인 독일이 [[북해]]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전투기로 적 폭격기를 막아내야 할 필요성은 항상 존재하였기에 [[슈퍼마린 스핏파이어]]같은 양질의 전투기도 준비해서 전쟁 초반의 위기를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폭격기 중시의 영향을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어서 [[볼튼 폴 디파이언트]] 같이 조종석 후방에 4연장 기관총탑을 달아서 폭격기 요격은 가능하지만 전방으로의 사격이 불가능해서 '''호위기와의 전투는 불가능한''' 말 그대로 괴팍하고 무식한 전투기를 만들기도 했으며 폭격기를 호위해갈 장거리 항속능력을 가진 단발 단좌 전투기 개발이 늦어져서 2차대전중에는 실전투입을 못하는 사태도 나왔다. [[미국]]은 초반에는 미국 본토 방어의 주도권을 가지고 해군과 육군 항공대가 대립하여 위에 설명했듯이 폭격기 무적론자인 빌리 미첼 준장이 봉변을 당하는 등의 일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미국 본토를 지키기 위해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중폭격기가 필요했기에 폭격기 무적론에 입각하여 설계된 폭격기가 2차대전에서 하늘의 요새라 불린 [[B-17]]이고 그 이외에 [[B-24]] 등의 4발 중폭격기가 있으며, 나중에는 [[B-29]]까지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그 외에 중(重)폭격기를 중심으로 한 [[융단폭격]]과 각종 폭격기 관련 기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측면도 있다. ~~덤으로 쑥재배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미국도 폭격기 무적론의 피해를 입어서 전투기 개발이 힘들어지면서 전투기를 요격기 이름을 붙이고 개발하게 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전쟁 초반의 전투기들은 [[P-40]]이나 [[P-39 에어라코브라]]처럼 뭔가 문제가 있는 기종들이 최신예 기종이었다. 결국 전쟁 중반에서야 [[P-47 썬더볼트]]와 [[P-38]]을 만들어내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고 중폭격기를 호위할 호위기로 [[P-51 머스탱]]이 등장하면서야 간신히 폭격기 무적론의 해악에서 벗어났다. [[미합중국 해군]]의 경우에는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함재기]]를 사용해서 넓은 [[태평양]]에서 전투하는 관계로 [[뇌격기]]와 [[급강하폭격기]]를 호위하거나 자국 함선들을 공중엄호해줄 목적으로 [[전투기]]가 반드시 필요했고 항속거리도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하기에 폭격기 무적론의 영향을 안받았다. [[독일]]도 영국을 침공할 때, 폭격기가 스스로 방어를 할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보이지만, 독일군한테 공군이란 "[[근접항공지원|지상군의 작전을 근접 지원하는 공중 포대]]"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는 [[Ju-87]]의 능력에 대단히 만족해하면서, 중(重)폭격기는 개발하지 않고 쌍발 중(中)폭격기에도 [[급강하 폭격기|급강하 폭격]] 능력을 강요한 사례에서도 잘 드러나있다. 대신 폭격기가 빠르면 전투기가 못따라오리라 보고 고속 폭격기를 계속 개발하려 했으나, 폭격기가 빨라질 수 있다면 당연히 전투기도 더욱 빨라지니 결국은 꽝. 게다가 장거리 중폭격기가 없었으니 전략 폭격도 못했고, 이 점이 [[독소전쟁]]에서 [[소련]]의 물량에 짜부러진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당장 소련 땅 깊숙히 자리를 옮긴 생산 공장을 쳐야하는데, 끽해야 쌍발 폭격기로 그 넓은 땅덩어리를 날아다닐 수가 있나... 그나마 전략폭격의 중요성을 이해하여 독일 내 전략 폭격의 신봉자로 불렸던 [[발터 베버]] 장군이 일명 '우랄폭격기'라는 4발 장거리 폭격기 개발을 추진했지만, 한정된 인원과 예산으로 빠르게 공군을 확충하면서 전투기와 급강하폭격기 사업에 우선순위가 밀리고 말았다. 결국 베버 장군의 죽음과 함께 우랄폭격기 계획은 완전 묻히게 된다. 그 후에는 오히려 근접항공지원과 급강하폭격을 더 강조하는 경향으로 독일 폭격기의 발전방향이 바뀌면서 결과적으로 봐서는 크게 생각도 없었고 그나마도 실천을 못했기 때문에 폭격기 무적론의 영향을 덜 받은 편이다. [[이탈리아]]는 시초는 좋았다. [[줄리오 두헤]]가 인생 말엽에 가서는 이탈리아 정부의 지지를 받았고, 그의 이론에서 주장한 것은 [[전략폭격]]에 가까웠다. 두헤는 '''폭격기는 아군 전투기의 엄호가 필수적이라 하였으며, 속도나 과무장 등을 통해 요격기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것은 무리'''라고 그의 저서 제공권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 시점의 전략폭격은 [[화학무기]]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적국의 [[민간인]] 상대로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터라 나름 사정 봐 가며 폭격을 하게 된 후대의 흐름과는 다소 어긋난다는 큰 약점을 가지고 있으나 나름대로 폭격기를 중시하지만 폭격기의 약점 및 전투기의 필요성등 다른 것도 생각을 해봤다는 점에서 실제적인 폭격기 발전가능성은 높았다. 그러나 그의 이른 사망으로 인해 발생한 정치적 문제, 공업생산력 및 관련 기술력이 떨어졌던 관계로 당초 높은 이상과는 달리 기대 이하의 폭격기만 개발했다. 그래서 이탈리아도 실천하지 못해서 피해를 덜 입은 셈이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라서 전투기 무용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해군의 경우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특히 적극적으로 도입하였고 그 결과 [[G3M]]과 같은 기종들을 배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겐다 미노루]]와 시바타 타케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는데 겐다는 전투기가 필요없다는 입장이었고 타케오는 여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과정에서 나름 최신예 폭격기라던 G3M조차 중국군의 요격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고 [[플라잉 타이거즈]]가 본격적으로 출격하기 시작하면서 항공기 손실이 늘어나자 폭격기는 전투기의 호위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한대로 [[A5M]]를 끌고와서 호위임무를 맡기게 된다. [[일본 제국 육군]]의 경우 이러한 전훈을 비교적 빠르게 받아들여서 폭격기의 비중은 줄이고 신형 전투기들을 ~~성능은 논외로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개발해서 배치했다. 반면 [[일본 제국 해군]]의 경우 앞서 말한 중일전쟁의 참상으로 인해 겐다 미노루도 전투기가 무용하다는 입장을 철회하는 등 호위전투기의 필요성 자체는 인식하였다. 그래서 A5M의 항속거리가 장거리 호위임무를 담당하기에는 짧다는 것 때문에 장거리 호위전투기로 사용할 쌍발전투기의 개발을 의뢰하였지만 결국 해당 쌍발전투기는 [[J1N 겟코]]라는 야간전투기가 되어버렸다. 이리하여 시대착오적인 사상과 맞물려 항속거리는 길었지만 약점이 많은 [[A6M]] 제로센으로 장거리 공격대를 호위하면서 중일전쟁으로 숙련된 항공대가 과달카날 등지의 남태평양 항공 소모전에서 괴멸적 타격을 입는 와중에도 공격 일변도 사상의 문제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육군이 1943년 9월 이후로 일명 '전투기 초중점주의'를 도입하며 비교적 성공적으로 노선을 전환한 것과는 달리 '''전투기 중시로 방향을 전환하는것은 1945년에 들어가서야 이루어지게 된다.'''[* 대동아전쟁 전훈 연구조사자료, 1945년 9월 발표. [[http://navgunschl2.sakura.ne.jp/tenji/40_senkun_navair.html|#]] ] 게다가 후속기의 개발 자체도 매우 지지부진해서 육군이 [[Ki-61 히엔]]을 의욕적으로 도입하고 약 3,000여기를 생산, [[Ki-84]]를 1944년에 양산하기 시작해서 신뢰성은 문제가 많았지만 3,400대 이상을 생산한 반면 해군은 2,000마력급 고성능 전투기를 다 합쳐도 1,900기 남짓이며 그나마도 그중 1천기가 '''초기불량도 고치지 못하고 양산명령이 떨어진''' [[N1K-J 시덴]], 그나마 전투기와 요격기로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던 개량형 시덴 카이와 [[J2M 라이덴]]은 각각 400여기 남짓이 고작, 제로센의 후계기로 기대를 모았던 [[A7M 렛푸]]는 시대착오적인 ROC와 맞물리며 양산조차 되지 못한다. 반면 단순 계산으로도 같은 엔진을 쓰는 라이덴을 두 대 만들 수 있는 '''종이비행기''' [[G4M]] 1식육공은 2,200여기나 생산되었다. 1식육공과 비슷한 급의 쌍발 폭격기인 4식 중폭 [[Ki-67 히류]]의 제식화가 1944년, 생산대수 600여기인 것을 보면 일해군이 일육군과 비교해 얼마나 폭격기무적론에 젖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일본은 그 공업기반이 구미에 비해 열악했습니다. 이 열세는 고출력 엔진의 개발이나 그 양산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즉, 고성능 엔진은 일본의 항공전력에 극도로 중요한 자원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중요한 자원을 해군은, 남태평양 방면에서의 '''전훈을 일부러 무시하고''' 전투기가 아닌, 쌍발 폭격기 등의 공격 전력에 충당한 것입니다...(중략)...원칙을 중시해 공격 전력을 중시한 해군입니다만, 통상 공격으로 항모 등 주력함을 침몰시킨 사례는, 1944년 이후 1건 정도밖에 없습니다. 또한 1944년 후반 이후 공격의 주체는 [[카미카제|특공]]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군은 그 항공 병력비의 변경을 1945년까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항공전력의 큰 특징인 공격능력의 유지를 도모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중략)...해군은, [[함대결전사상|'적 함대의 주력을 격파하면, 그 재건에 시간이 걸려 전쟁 지속이 곤란해진다. 그러니 적의 주력을 공격한다.']] 라는 생각을 [[러일전쟁]]의 승리로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가상적이 미국으로 바뀐 이후에도, 이 생각은 유지됩니다. 이리하여 해군은 자신들의 생각하는 주적을 격멸하는 것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것이 됩니다. 또한, 진주만 공격까지 그 주적은 전함이었습니다만, 미드웨이 이후 그 주적은 항모가 됩니다. 전쟁의 양상이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발상이 거의 고정관념화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로 보아, 해군이 항공운용의 원리원칙을 지킨 것은 어떤 의미로는 종래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일본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 '태평양전쟁에 있어서 항공운용의 실상, 운용이론과 실제 운용의 차이' [[http://www.nids.mod.go.jp/publication/senshi/201203.html|#]] 의 저자 유라 후지오가 항공자위대 OB 홈페이지에 기고한 요약문에서. [[http://www.tsubasakai.org/Senshi_Kiji_283HP_000.htm|#]] [[http://wgforum.kr/kancolle_war_museum/7431186|번역]] ] 결국 [[함대결전]]만을 상정하고 전력을 정비해온 일본 제국 해군은 일본 제국 육군이 전훈을 착실하게 반영하는 와중에조차 후진적인 공격 일변도 사상과 폭격기 무적론을 붙들고 있었던 셈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